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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 일기/기록

[글또]개발자 심민섭의 삶의 지도

by MS_developer 2024. 9. 22.

출처: 글또 노션페이지 (https://zzsza.notion.site/ac5b18a482fb4df497d4e8257ad4d516)

 

글 쓰는 또라이가 세상을 바꾼다

 

 

라는 모토로 시작한 글 쓰는 개발자 모임, 글또가 이번 10기를 마지막으로 진행한다.

 

글또에 지원하고자 하면 한 가지 재밌는 관문을 거쳐야 한다. 바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삶의 지도"를 작성하고, 공유해야 하는 것이다.

 

글또에 지원하기 위해, 또 곧 서른 살이 되는 내 인생을 되돌아보는 좋은 계기인 것 같아 삶의 지도를 작성해 보려고 한다.

 


여행을 좋아했던 아이

 

어렸을 적부터 나는 무척 호기심이 강한 아이였다.

 

그 나이 또래 아이들보다 더 세상 모든 것이 신기해했고, 막내로 이쁨만 받아 커서인지 겁이 없었다.

 

나는 툭하면 '모험'을 즐겼는데, 때로는 윗층 친구와 함께, 때로는 홀로 '여행'을 떠나 동네를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모르는 동네를 밝히는 것이 마치 게임 속 캐릭터가 밝혀지지 않은 지도를 밝혀나가는 과정과 같게 느껴졌다. 

 

출처: https://general-audience.tistory.com/21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ASSASSIN'S CREED ORIGINS) 공략(일일미션, 석판 찾기))

 

이때 난 인생 처음으로 "소통"의 중요성을 깨우치는 계기가 되었다.

 

아직 어렸던 나는 어머니에게 이러한 사실들을 고지조차 하지 않고 홀로 훌훌 떠나버리기 일쑤였기 때문에 저녁 때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나를 애타게 찾아다니셨다. 이 의례(?)는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까지 매년 봄 정기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애가 납치라도 당한 줄 알아 정말 많이 울으셨다고 한다. 엄마 미안해

 

 


왕따로 배운 눈치보는 법

 

앞서 언급했듯, 나는 꽤 제멋대로인 아이였다.

 

남의 눈치도 잘 안 봤고 좋아하는 여자 아이를 놀려서 울렸던 적이 있을 정도로 짓궂은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또, 놀이터에 처음 만난 또래아이와 친구가 되어 그 친구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을(!) 정도로 친화력이 좋은 편이기도 했다.

 

아줌마 된장찌개는 왜 검정색이에요? 우리 집 된장찌개랑 색이 다르네

 

 

생전 처음 보는 애가 자기 자식이랑 친구라고 와서 밥을 차려줬는데, 이런 말을 들으셨을 친구의 어머니는 무슨 생각이 드셨을까. 후에 인터뷰 아닌 인터뷰를 하게 되었는데, 애가 너무 귀여워서 그냥 허허 웃어넘기셨다고 한다.

 

이러한 행동들은 해석하기에 따라선 좋게 보일 수도 있었지만 누군가에겐 불편함으로 다가갈 수 있음을 이때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후폭풍은 뒤늦게 찾아왔다.

출처: Photo by Alicia Christin Gerald on Unsplash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내가 이사간 동네는 이전과 많이 달랐다.

 

소위 말하는 "짱" 개념이 있는 학교였고,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꽁초를 몰래 주워 담배를 피는 아이들이 있을 정도로 교육 환경이 좋다고 말할 수 없는 곳이었다. 실제로 초등학교인데도 점심시간이 되면 조례대 아래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연기가 피워 올라왔었다.

 

처음 전학 온 나에게 친구들이 물었다.

 

너 싸움 잘해?

 

 

난 잘한다고 했다.

 

그리고 맞았다. 이미 싸움을 많이 해본 친구들에게 둘러쌓여 맞았고, 울었다.

 

우는 나를 보며 때린 아이들은 웃었다.

 

모든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깨닫게 되었다.

 

아, 무조건 생각한대로 말하면 안 되는구나.

 

매일매일이 힘든 순간이 되었고, 나는 이 상처를 오랫동안 앉고 가게 되었다. 지금도 이때를 생각하면 정말 무서울 정도로 학교가 가기 싫었고 힘들었다.

 

동시에 내게는 너무나 중요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살면서 처음으로 남의 눈치를 보게 되었고, 내가 한 말이 "맞을 짓"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변호사가 되고 싶었던 아이

 

이후에도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지만, 나는 다행히 크게 엇나가지 않고 클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웃게 만드는 즐거운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힘들 때도 웃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알았고, 작은 것에도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힘든 시기 나를 이해해 주려 노력하시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주신 부모님께 늘 감사하는 마음은 이때부터 생긴 것 같다.

 

 

출처: Image by  LEANDRO AGUILAR  from  Pixabay

 

이 즈음 내 꿈은 "변호사"였다.

 

깔끔한 정장을 입고 누군가를 변호한다는 사명감이 담긴 얼굴, 그리고 알아듣기 힘든 멋들어진 말들이 멋있어 보였다.

 

단순한 동기였지만, 어린 내게는 커다란 동기가 되었다.

 

변호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살면서 처음으로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로드맵을 짜보기도 했다.

 

변호사는 내 생각보다 되기 어려운 직업이었고, 그만큼 준비와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때까지의 나는 밖에서 노는 걸 더 좋아했던 아이였는데, 처음으로 "내 의지"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와서 공부했다.

 

확실한 목표를 꿈꾸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 원동력이 될 수 있는지 이때 처음 알았다.

 

별안간 나의 외고 입시는 한순간에 무너지게 되었다.

 

당시 나는 "사회" 영역을 특출나게 잘했기 때문에 주변에서 이런 말을 자주 들었다.

 

너는 사회를 잘 하니까 사회 영역으로 외고 가면 되겠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 해 여름 돌연 "사회" 영역이 사라졌다.

 

책으로만 읽던 "지독한 절망"이 무슨 뜻인지 몸으로 사무치게 깨닫는 날이었다.

 

나에게 덕담을 나누던 외고 입시 선생님들은 내 눈을 피했다. 나와 눈을 마주치면 바쁘게 어디론가 가버리셨다. 아마 혼란스러워하는 어린 나에게 무슨 말을 해줄지 모르셨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도 사람이니까.

 

삶이란 의지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의 나는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고, 나는 꿈을 좇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아쉬운 결정이지만 어쩌겠는가, 고작 16살 중학생에겐 버거운 현실이긴 했었다.

 


미국이 그렇게 좋아?

 

삶의 방향을 잃은 나는 다시 노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가 되었다.

 

또래 친구들과 피시방이나 노래방도 가고, 공부는 적당히 하면서 겨우겨우 하위권만 면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이런 내 꼴을 보고도 이유 없는 훈육보다는 장래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시도하셨다. 그리고 미국에 교환학생으로 1년을 다녀오면서 경험을 쌓고 마음을 다지길 바라셨다.

 

그럼 한 번 가볼까?

 

 

몇 주간의 여름 캠프와 여행 경험이 고작이었던 나는 무작정 미국 유학에 떠났다.

 

외고 준비와 먼저 유학을 갔던 누나의 특훈 덕분에 영어는 괜찮게 했지만, 무리 없이 유학 생활을 하기에는 부족한 실력이었다.

 

나는 여전히 겁이 없었다. 그렇게 맞았는데

 

무작정 떠난 유학생활은 역시 쉽지 않았다.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아 1년 사이에 거의 15킬로가 빠졌고, 머리를 제대로 자르지도 않아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거지 왕초 꼴이 되었다.

 

그런 꼴이 된 내게 부모님은 미국에서 계속 공부하고 싶은지 물어보셨다.

 

나는 당연히 한다고 했다.

 

다양한 방과 후 활동, 한국과는 다른 커리큘럼, 그리고 개방적인 친구들.

 

고등학생의 나는 이것이 얼마나 커다란 특권인지, 그리고 축복인지 몰랐지만 좋은 기회임은 알아차렸던 것 같다.

 

과거의 나를 돌이켜볼 때 박수칠 수 있는 몇 안 되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출처: Image by  Ag Ku  from  Pixabay

 

위기는 금방 찾아왔다.

 

사립학교는 이전에 다니던 공립학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어려운 수업들이 많았고, 이곳에서도 나는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다. 친구들은 아이비리그를 꿈꾸며 어렸을 적부터 같은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쉽게 융화되기도 어려웠다.

 

소위 말하는 "엘리트 교육"을 받은 친구들과 말을 섞기엔 부족한 면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미 인생의 커다란 위기를 맞아봤던 나는 이 난관을 그럭저럭 잘 헤쳐나갔다.

 

여전히 사립 교육은 어렵고 힘들었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데 부끄러움은 없었다.

 

모르면 배우면 되지.

 

 

다행히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나는 지도 학생(tutor)들에게도 적극적으로 도움을 청해 학교 생활에 그럭저럭 적응해 나갔다.

 

여전히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렇게 커다란 위기처럼은 느껴지지 않았다.

 

특히, 힘들고 어려웠던 나의 상담을 들어주고 공부를 도와줬던 또래 친구들이 커다란 의지가 되었다. 나보다 훨씬 어른스럽게 본인의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그들이 멋있어 보였다. 나도 그들처럼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포터가 천직

 

대학에 가게 되면서 고등학교 친구들은 대학에 들어가면서 뿔뿔이 흩어졌다.

 

모두가 목표하는 꿈을 향해 달려 나갈 때, 나는 아직 "내 꿈"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다행히 대학교에는 나와 비슷한 친구들이 많았다.

 

친구들과 "꿈"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나는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나는 서포터가 천직이야.

 

 

어렸을 때부터 남들에게 도움을 받아 위기를 극복했기 때문일까, 늘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장르를 불문하고 어떤 게임을 해도 나는 늘 보조 직군을 선호했다. 누군가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마냥 있었다. 누군가 알아주지도 않아도 좋았고, 알아주면 더 좋았다.

 

문제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직업을 어떻게 가지는가였다.

 

서비스업을 해야 하나? 그러면 알바?

 

여러 가지 고민이 많아지던 때, 나는 우선 미뤄뒀던 군대를 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의외의 천직을 만나게 되는데...

 

출처: 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PYH20200224100900013)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멋"만 보고 지원한 의장대에서 현충원에 배정되면서 헌신과 봉사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었다.

 

호국요람을 지키며 나라에 감사를 표하러 오는 분들을 위해 사열을 하고 예를 표하는 것. 다른 나라에서 방문한 대사들에게 대한민국의 건재함을 보여주는 것. 나라를 위해 헌신한 군인 분들의 안장식을 치르는 것.

 

봉사라는 개념은 폭넓게 적용할 수 있었고, 세상에는 다양한 봉사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군인"이라는 직업을 계속 가질까도 고민해 봤지만, 그보다는 좀 더 적성이 맞는 일이 있지 않을까 하고 다양한 분야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웹 서포터 = 프로그래머?

 

군대를 전역할 즈음까지 자아성찰은 계속되었다. 

 

마치 지금 삶의 지도를 그리는 것처럼, 지난날들을 되돌아보며 내게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어떻게 내가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잠시 스쳐가듯 언급했는데, 나는 게임을 좋아한다. 7살 터울이 있는 형 덕분에(?) 5살 때부터 게임의 매개체인 컴퓨너와 친하게 지냈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자연스럽게 컴퓨터로 누군가에게 도움 되는 일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마치 한강의 기적을 보듯, 전자기기는 나의 어린 시절을 관통해 가며 급격하게 발전해 왔다. 내 폴더폰이 스마트폰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1GB 라는 용량이 커 보이던 시절은 이미 까마득해질 정도로 옛날이 되어버렸다.

 

한 번 배워보지 뭐

 

 

나의 겁없는 무모함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대학생인 나는 "컴퓨터 공학" 전공에 눈길을 돌렸다.

 

이미 경영학 전공으로 길을 잡았기 때문에 컴퓨터 공학을 같이 병행하는 것은 꽤나 리스크가 큰 일이었다.

 

군대에서 전역 후 복학하여 컴퓨터 공학 수업에 뛰어들었다. 윈도우에 익숙했던 내게 맥 OS는 불친절했으며, 처음 써보는 Eclipse라는 텍스트 에디터는 그저 상상 속의 동물인 유니콘을 타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Hello World!

 

 

처음으로 콘솔 창에 그 문장을 쳤을 때 개발자들이 느꼈을 희열도 잠시, 교육의 수준은 발 빠르게 어려워졌다.

 

출처: https://kr.pinterest.com/pin/662451426464020202/

 

 

프로그래머는 내가 가진 환상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과제를 위해 밤늦게까지 학교 Lab에서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았으며 그럼에도 기한 안에 과제를 내는 것이 쉽지 않을 때마다 내가 적성이 맞나 의문이 들었다. 이때는 stackoverflow에서 도움 받는 것이 너무 자존심 상했다. 대학교에도 지도 학생은 있었는데, 지도 학생의 도움은 마다하지 않는 이중성을 보이며 나의 고민은 깊어져 갔다.

 

그때즘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는데, 바로 학교에서 다 같이 학교 웹페이지를 만드는 일이었다.

 

뭔지도 모르고 수업을 들었는데, JSP 기반으로 Java Spring과 JQuery, Ajax를 활용해 만드는 웹 페이지 수업이었는데 매우 어려웠다. html, css, javascript는 이때 처음으로 배웠는데 2주 만에 내용을 다 배우고 바로 웹 페이지 작업에 들어갔다.

 

어? 왜 재밌지?

 

 

분명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들이었다.

 

전공 수업은 4개나 됐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는데 친구들과 협업하며 웹 페이지를 만들어가는 작업이 너무 재밌었다.

 

학교의 웹페이지를 새롭게 하나 추가하는 작업이다 보니 실제 관련 부서와도 자주 미팅을 하면서 진행했는데, 오고 가는 공방(?)으로 서비스 정의를 해 나가는 과정이 마치 협상 테이블에 앉아 담판을 짓는 외교관처럼 느껴져 그 과정마저 흥미로웠다.

 

사람들과 소통하며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무언가(product)를 만드는 것이 너무 설레고 즐거웠다.

 

프로젝트는 10주라는 시간 내에 완벽히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실제로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교수님과 학생들이 여름방학 동안 더 작업을 해보자고 할 정도로 열의를 보인 과목이었다.

 

처음으로 "웹 개발자"라는 직군에 눈이 가게 되었다.

 

특히 프론트엔드라는 개발자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서버와 통신하여 데이터를 보여주고, 퍼블리싱까지 맡아서 진행한 과정들이 매우 중요하게 느껴졌다. 클라이언트들은 서버에서 어떤 처리를 통해 데이터를 주는지보다 그 데이터를 "잘" 보여주고 사용자가 매끄럽게 페이지를 사용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고, 나는 이 니즈를 충족시켜주는 것에 묘한 쾌감을 느꼈다.

 

찾았다, 현실 서포터!

 

 

라는 느낌이었다.

 

웹에서 도와주는 사람. 프로그래머. 

 

뭔가 멋있어 보이고 마음에 들었다.

 


바닐라 JS도 모르는 게 까불어!

 

내 대책없음이 단점으로 조명되는 순간도 찾아왔다.

 

높았던 흥미에 비해 바쁜 학업으로 웹 공부를 더 하지는 않았다. 바쁜 와중에도 흥미를 가지고 학업 외의 공부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이때의 나는 잘 몰랐던 것 같다.

 

부랴부랴 졸업을 하고 나니 길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처: https://velog.io/@qkenrdl05/%EA%B8%B8%EC%9D%84-%EC%9E%83%EC%97%88%EB%8B%A4

 

웹 개발 공부는 거의 하지도 않았고, 이론과 자바 공부만 하던 내가 한국에 와서 무언가를 하기엔 base랄 게 없었다.

 

지식도 JS 관련된 부분은 전무했다.

 

부랴부랴 React 공부를 시작했지만, 뭔지도 모르고 시작했기에 크게 의미를 못 느꼈다.

 

아 그때 좀 물어볼 걸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진짜 늦었다.

 

이제는 주변에 물어볼 사람도 없다. 한국에서는 같이 개발 공부를 한 친구도 없었다. 막막함을 느끼던 내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캐나다에서 프론트엔드 개발을 하고 있던 누나였다.

 

사실 누나는 컴퓨터 공학 전공도 아니었는데, 개발자라는 직업에 장래성과 본인과 적성이 맞는 점을 찾아 개발자가 되어 있었다.

 

부끄러움은 잠시라고 생각했다.

 

나는 넉살 좋게, 그리고 가족이라는 방패를 두르고 누나에게 적극적으로 물어봤다.

 

누나의 도움 덕분에 이때 처음으로 바닐라 자바스크립트를 공부했다.

 

순수 자바스크립트로 페이지도 만들어보고, flexbox라는 것도 처음 써보며 html이 무엇인지, css가 무엇인지 이론들을 차근차근 배워갔다.

 

만들었던 웹 페이지는 잃어버렸지만, 정말 열심히 만들었고 웹 개발에 대한 내 흥미가 어느 정도였는지 다시 돌아볼 수 있었다.

 

디자인 감각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무언가를 스스로 만들어 남에게 보여준다는 점과 또 다른 누군가가 내가 만든 웹 페이지를 이용하는 상상을 하니 짜릿했다.

 

빨리 인터넷이란 곳에 내 족적을 남겨보고 싶었다.

 


너 React-Native 좋아하니?

 

프론트엔드 개발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자바를 배웠던 나의 지식들을 철저히 깨부수는 문법들과 맞서 싸우며 나는 2022년이라는 늦은 시간에 React 공부를 비로소 제대로 시작할 수 있었다.

 

부트캠프도 듣고, 개인 공부도 병행해가며 나름 로드맵을 잘 쌓아갈 수 있게 되었다.

 

부트캠프에서 만난 마음 맞는 사람들과 토이 프로젝트도 진행하며 재밌는 코딩생활을 이어나갔다.

 

이미 취업시장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취업준비는 어려웠지만, 운 좋게 S/I 스타트업에 취업했다.

 

혹시 React-Native 하세요?

 

 

처음 취업하고 들었던 말이다.

 

React-Native? 그건 또 뭐지? 리액트 기반의 프레임워크인가?

 

나는 그만큼 무지했다.

 

어쩌겠는가, React랑 비슷하다는 말에 무작정 코딩을 시작했다.

 

div가 View구나. onPress가 onClick이구나. 

 

떠듬떠듬 배워가며 일을 시작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진짜 무모한 패기로 해결했다. 앱 개발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건만, 어떻게든 배워가고 찾아가며 일을 계속했다. 

 

신기하게도, 그럼에도 일이 너무 재밌었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마치고, 또 하나의 프로젝트를 마치면서 다양한 기술스택과 지식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니포켓로그가 신기해 코드를 찾아보고, 공부하겠다고 리액트의 구동원리에 대해서도 스스로 찾아보는 지금의 내가 되었다. 마치 외고를 준비하던 때가 떠올랐다. 

 

좋아하면 다 하게 되어있네.

 

 

이 단순한 진리를 뒤늦게 깨닫고, 오늘도 힘차게 살아가고 있다.

 


어제보다는 나은 내가 되길

 

 

 

삶의 지도를 그려보며 돌이켜보니 인생에 여러모로 대책 없는 순간들이 있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포스팅에서 적은 굵직한 일들 외에도 소설작가가 잠시 꿈이었던 순간,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를 만나게 된 순간 등 인생을 빛나게 느끼도록 하는 다양한 순간들도 함께했기에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어려운 난관을 헤쳐나갈 든든한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고, 그들로 인해서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것 같아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순간들을 되돌아보며,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 다시 되뇌었다. 그리고 내가 어떤 목표를 가졌었는지 상기되었다. 내게 또 다른 원동력이 되어줄 이 글을 쓸 수 있음에 감사하며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의 "나"가 되기 위해 힘차게 달려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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